글/ 최광진 (미술평론가)

정지현의 작품에서 떠오르는 인상은 ‘어색한 실재감’이다. 실재감이라는 것은 그려진 대상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 일루전으로 인해 느껴지는 것이고, 어색하다는 것은 그것들이 놓여진 공간과의 조화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낯설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색함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설정에서 비롯 되어진다. 그의 작품의 배경들은 한결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이나 피어 오르는 몽롱한 구름, 혹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 등을 연상시키는 정적이고 적막한 공간으로 조성됨으로써 화면 중앙 부근에 설정되는 주제 이미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이러한 배경에 갑작스럽고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형상들은 실제 사물을 연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배경과 극적인 대비를 연출한다. 이러한 이미지와 배경간의 통사적 특징은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공통된 것으로서 그의 작품의 의미론적 해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병치시키는 데페이즈망 기법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일상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에 의해 무의식에 도달하려는 의도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작가는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에는 철판과 알, 솜과 알, 나무와 물고기, 알과 물고기, 거울판과 알 등의 병치가 일어나지만, 그러한 소재들은 무의식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동일한 소재에 대한 집요한 집착은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맹목적 선택이라는 가정에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알과 물고기 같은 소재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하기도 함으로써 이런 소재에 담긴 어떤 심층적 상징의미가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그렇다고 무의식적 효과를 전적으로 배재한 것은 아니다. 형상과 배경 간의 어색한 배치는 초현실주의자들에 비해 비록 소극적이긴 하지만 일상적 질서를 생경하게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의식적인 효과를 유발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무의식적 효과를 약화시키는 대신 대상이 갖는 상징적 효과를 덧붙이려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소재로 선택한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은 생명성, 시작, 깨지기 쉬운 가냘픔, 겉과 속의 속성이 다른 이중성 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물고기는 생명성, 어쩔 수 없음, 다수 군중 등을 의미하고, 솜이나 소파는 편안함과 안식, 금속판이나 전선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내적 불안과 위기 상황을, 그리고 나무는 꿈, 희망, 소통, 신앙 등과 같은 인간의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작가의 설명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소재 선택에 대한 작가의 삶의 상황적 배경이 불분명하고, 이러한 이성적 의도에 앞서 다소 우연적인 착상에 의존하여 선택되었을 여지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소재인 알과 물고기는 어떤 공통된 분명한 특성이 유추된다. 알은 외형적으로 타원의 둥근 형태로 말미암아 약간의 경사에도 굴러 떨어지면 깨어지게 되고, 한번 깨어지면 복원이 불가능하다. 또한 액체의 내용물을 아슬아슬하게 보존하고 있는 껍질은 단단해 보이지만 약간의 충격에도 스스로의 질서가 파괴되는 불안한 존재이다. 그리고 알이 놓여지는 위치가 주로 경사가 있는 거울이나 나무판 가장자리에 배치됨으로써 그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다음으로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물고기는 한결같이 물을 떠나 솜으로 채워진 병에 담기거나 허공에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의 안정된 위치를 벗어나 생경한 장소에 던져짐으로써 불안한 존재로서 자리한다. 이들 두 소재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특징은 어색한 공간에 놓여진 불안한 존재들이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배경과 격리되어 보임으로써 소외의 감정과 더불어 대상 이미지들은 오래 지탱할 수 없어 곧 소멸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는 느낌으로 인해 허무하고 아련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런 측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 자화상일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작가가 여성인 것을 상기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마르고 큰 키에 비교적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얼핏 낙천적으로 보이는 너털한 웃음 한편에는 감수성이 섬세하고 심성이 여린 여성들이 갖고 있는 불안과 갈등이 엿보인다. 그것은 쉽게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면적 심리에 충족되지 못한 채 자리하고 있는 억압적 갈등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알과 물고기는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사회 속에 던져져 적응과 저항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다수의 선택에 의지하여 안락을 취하곤 하는 현재의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그녀가 대부분의 작품 제목을 <낯선 공간 속의 안식> 혹은 <위기 속의 안식>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이러한 가정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공간이 낯설다는 것은 이 시대 사회가 설정한 가치와 윤리, 그리고 제도와 정의들로서 자기의 원초적 자아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은 그러한 현존재로서의 주체와 사회적 타자간의 거리가 있음에도 다수의 사회적 타자가 설정한 형식과 규범을 따라갈 때 느끼는 안도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역으로 말하면 주체의 상실이고, 스스로를 독립적으로 지탱해 나갈 수 없는 나약한 체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날 급변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작가의 심리적 실존인 동시에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포스트모던적 정보사회는 우리에게 깊이 있는 내적 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점차 고갈되고 아무 생각 없이 다수가 내린 규범과 정의에 이끌려 판단하고 가치를 결정한다. 스펙터클하고 내용 없는 이미지 기표들에 자신을 동화시킴으로써 주체 없는 익명화와 비개성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안식에 어쩔 수 없이 동화되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불안한 모습을 관조하고 스스로의 나약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은 이처럼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주체로서의 여성과 사회적 타자 사이에서 겪는 미묘한 심리적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것에서 자신의 주제를 끌어낸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 억압을 밖으로 쉽게 표출하지 않고 푸근하게 포용하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성에 대한 환기인 동시에 사회에 내던져진 인간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 대한 실존적 질문으로서 오늘날 현대인이 처한 갈등구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