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성희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큐레이터, 미술사)

작가 정지현은 바깥세상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작가이다. 여러 가지 주제와 방식을 시도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작가가 있는데 지금까지 정지현의 경우를 살펴보면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재와 방식에 있어서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처음 주제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고 심도 있게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처음 그녀의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소재는 알과 물고기이다. 이것들은 깨지기 쉽고 다치기 쉬운 존재들인데 정지현은 이를 주로 경사가 있는 거울 혹은 판 가장자리에 배치하거나 물밖에 놓아 두어 불안한 그들의 정체성을 강조시켜왔다. 평론가 최광진은 ‘어색한 공간에 놓인 불안한 존재’라고 묘사하면서 작가 개인의 불안한 심리상태 혹은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억압된 자아와 연관 짓고 있다.1

이후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는 연달아 이어진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서 꽃과 가시, 혹은 작가의 방에서 볼 수 있음직한 가구나 집기 등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화면 위로 끌어들인다. 이들 역시 시간과 공간을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진공 상태의 배경 속에 부유하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 간의 이질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소재 뿐 아니라 표현적인 면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따뜻하게 묘사된 방안의 사물들이 작가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드러낸다면, 서랍 속에 들어있는 가시 돋친 선인장이나 깨지기 쉬워 보이는 구슬들은 날카로우면서도 불안한 감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2

최근 들어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감이다. 그녀의 가냘프면서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꽃에는 핏빛처럼 붉은 얼룩들이 더욱 많아졌고 초기에 자주 등장하던 소재인 물고기가 아름다운 색채를 입고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다섯 번째 개인전의 부제 <얼룩지다, 스며들다 Smearing and Permeating>는 이러한 특징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사막의 봄 Spring of Desert>(2008)3 에는 중심에 핀 선인장과 그 주위를 마치 물속처럼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열대어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있는데, 이는 얼핏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상상의 공간이다. 둥근 형태의 선인장은 끝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고 사막의 한가운데 피어 오른 색채는 따뜻한 기운으로 봄을 연상하게 한다. 또 다른 작품 <사막의 꽃, 스며들다 Flower of Desert-Permeating>(2008)4 에서는 마치 손으로 만지면 피가 나와 흐를 듯이 뾰족한 대칭적 이파리 끝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찔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평론가 이선영이 정지현 작품에 있어서 색채의 의미를 재현성 보다는 촉각성에 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물고기들이 자신의 색채를 벗어내어 다른 개체나 환경으로 그 얼룩을 묻혀가는 형상이라면, 작품 <피어나다, 스며들다 Bloom-Smearing>(2008)5 는 시들어 가는 백색의 꽃이 그 내부로부터 스며나는 검은색 얼룩으로 오염되어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다치기도 하고 어둡고 추한 면들에 고통 받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서 겪게 되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당황하기도 한다. 내 안의 다른 나의 모습, 이 같은 타자성에 오염되는 불안함을 그녀는 스며나는 얼룩과 시들어 가는 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의 병치를 통해 불안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방식은 <사막정원 Desert Garden>이라는 전시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결핍이라는 사막의 부정적 개념과 정돈되고 꾸며진 정원의 긍정적 개념이 서로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느낌은 정지현의 작품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이번 전시가 그녀의 작품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아마도 다음 전시가 열릴 때 즈음에 더욱 분명해 질것이다. 그녀는 개념의 점진적인 변화와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나선형 구조로 계속 발전해 나아가며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배경을 빈 공간으로 남겨두어 정확한 시점이나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개인의 문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아와 실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녀가 보여주는 심리적 긴장감과 갈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시간들이 보는 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사뭇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