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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寓意, allegory)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알레고리’라는 말로 통용된다. 이 말은 속내를 전달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말할 걸 터놓고 직접 얘기하는 대신, 비교가 될 수 있는 사물을 빌려 자신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ēgoria)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스는 세계적으로 많은 우화를 간직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알레고리’의 본고장이다. 역사이래로 많은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알레고리를 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할 적에 습관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인격화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유니콘, 페가수스, 수선화가 잘 알려진 알레고리들이다. 이것들은 그들이 속내를 말하고자 지어낸 대리물(代理物, surrogate)의 이름들이다. 말하는 당사자인 주체의 이름이 아니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타자(他者, others)화한 이름들이다. 주체를 타자에게 내주었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속내를 말할 때 ‘타자’(alla)를 빌려서 ‘말한다’(agorein)하고, 이 둘을 합성해서 ‘알레고리아’라 불렀다. 우리말에도 ‘우의’란 ‘다른 사물에다 자신의 뜻을 붙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붙일 우’(寓)에다 ‘뜻 의’(意)를 합성시킨 걸 볼 수 있다. ‘비유해서 정곡을 찌른다’는 걸 뜻하는 ‘풍자’(諷刺)라는 말로도 쓰인다.
정지현의 전시를 소개하는 데 왜 ‘알레고리’니, ‘우의’니 ‘풍자’니 하는 말을 말하는지 의아해 할 것 같다. 사정은 이렇다. 작가가 2003년 첫 개인전에 출품한 <낯선 공간 속의 안식>이후 내놓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알·물고기·베개·의자·보석·선인장, 그 밖의 많은 사물들이 작가의 속내를 전달하기 위한 대리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화면에 등장시켜 혼신을 다해 그렸을 뿐 아니라, 이것들이 이 세상 어디엔가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걸 보는 사람들에게 설득하고자 연금술사의 눈과 손으로 그렸다. 리얼리즘의 형식을 빌려 픽션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 없는 사물들을 여실하게 재현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들이 ‘우의의 형식’(allegorical type)을 갖추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무언가 다른 것들을 말하려는 감추어진 의도가 그의 알레고리들에서 아주 진하게 느껴진다. 그 품목들을 열거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작업노트」의 일절을 옮겨본다.
표백된 듯한 정적의 공간에 들어선 핏빛의 가시가 돋친 낯선 선인장, 붉은 곰팡이가 피어나는 퇴색한 의자, 날카로운 선인장을 품어내는 변종 된 꽃, 이것들은 부드러우나 날카롭고, 편안하지만 불길하고 아름답지만 불편한 것들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 완전코자 박제된 것들로, 마치 영원 속에서 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완전히 사라져 이러한 안식은 영원할 것만 같다.
「노트」가 말해주는 건 적어도 3가지다. 이것들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열거해서 자신의 심경까지를 덧붙였다. 영원한 안식의 그리움에 대해서만 아니라, 영원한 안식이란 것의 허구성에 대해서와, 실재와 허구 사이의 틈새를 메우려는 회화적 충동이나 의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한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전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앞서 언급한 ‘우의’의 필요조건들이다. 이번 학위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독특한 속내를 하나로 묶어 <사막정원>이라는 표제를 붙여 발표한다. 아래에서는 근작 <사막정원>이 시사하는 우의적인 면을 세세하게 열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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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정원>의 이해에 도움이 될 도입용어 하나를 먼저 말한다. ‘우의(寓意)의 방’이 그것이다. ‘방’(房, room)이라 했지만, 이 말 역시 작가의 작품에서 옮겨온 말이다. 그녀의 초기작품들(2003)에는 ‘방’대신 ‘낯선 공간’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투명한 병이나 부드러운 솜, 차가운 철판이나 하늘을 반사하는 거울, 혹은 광활한 사막 등을 등장시켜 이것들 안에다 알레고리의 품목들(알·물고기)을 안치한 것들이 눈에 띈다.1
그러나 확실하게 방이 등장한 건 2005년 개인전에서다. <나의 방. 바라보기. In My Room>을 표제로 서랍·베개·의자·소파에다 붉은 곰팡이를 피어나게 하거나,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선인장·보드라운 홀씨·깨지기 쉬운 구슬 등을 담아 놓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을 등장시켰다.2 ‘방’을 주제로 6월과 8월에 걸쳐 두 번의 개인전을 펼친 것도 이 때였다.
2005년의 전시는 <페르세포네의 밀실>이라는 주제로 <코레의 방>을 제작하여 작가의 우의적 발상을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코레의 방>이나 <코레의 방, 안으로 바라보다>는 합성수지로 만든, 흡사 벌집 파사드의 셀을 연상시키는 반복되는 백색의 작은 방들에다 핑크와 코발트 색깔의 보석 알을 재워,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연상시켰다.3
일련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등장시켜 그녀가 거쳐하는 비밀의 방이자 가상의 방을 재현하였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페르세포네 말고도 저승의 여왕 프로세르피나(Proserpina)같은 마(魔)의 여인이 있다. 지상에 있었을 때 이 여인들은 각각 제우스(Jeus)와 쥬피터(Jupiter)를 아버지로 둔 미녀의 딸들이었다. 모두가 미모 때문에 어두운 세계로 납치되어 운명이 바뀐 여인들이다. ‘미인단명’이라는 우리 속담을 생각케 하는 알레고리의 표상들이다.
비운의 여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지하세계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운 방에 살면서 마계와 저승의 여왕으로 변신하였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름다운 여인들이 애석하게도 어둠의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으로 변신했다는 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악의 존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지현의 ‘페르세포네의 방’에 얽힌 우의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가가 ‘우의의 방’을 신화에서 찾아 화면에 등장시킨 것도 마(魔)의 세계가 지배하는 음울하지만 화려하고도 현란한 빛깔과 용모가 오늘의 시대상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신예 여류작가는 우리 시대의 화려와 위선의 극치를 그리기 위해 역시 화려한 대리물을 등장시켰다. 2006년과 2007년이 결정적인 해였다. <사막의 봄>, <사막의 꽃>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많은 변작들을 제작했다. 품목들은 재정비되었고 체계화되었다. 어떠한 품목들이건 페르세포네를 유혹하기 위해 아버지 제우스가 덫을 놓은 짙은 감색의 커다란 수선화를 원형으로 해서 그렸다. 수선화를 변용해서 가시를 추가하거나 선인장 같은 식물로 변종시켰다. 근친상간의 알레고리로서의 수선화는 원래 저승의 신 플루토(Pluto)와 하데스(Hades)가 그들의 사악함을 선함으로 위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남자인 나르시스(Narcissus)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수선화가 된 것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으나 교만과 어리석음 때문에 아름다우리만큼 사악한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걸 말해주는 알레고리다. 정지현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변종 식물 또한 오만하고 사악한 시대의 알레고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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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이 수선화의 변종들을 그린다는 건 오늘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면서 그 스스로 페르세포네가 되고 프로세르피나가 되어야 할 운명(?) 때문이다. 아래서는 이러한 운명이 이루어진 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근작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리고 있는 것들이 영원히 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실 허구다. 다다를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노스탤지어일지 모른다. 붉은 가시가 돋고 곰팡이가 핀다는 건 시간을 깨트려서 마침내는 영원의 실체를 없애버리려는 거다.
가시와 곰팡이는 무상과 영원을 횡단하는 틈새에서 피어난다. 이것들은 틈새를 나타낸다. 이것들이 촉각·청각·시각 같은 감성적 복수성을 야기한다. 복수성은 뭉뚱그려진 무엇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혼재된 시공간을 넘나들며 감정의 틈새를 채우지 않을 수 없다. 심리적이고 신경증적인 분열감마저 느낀다.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중간자적 위치에서 나는 혼란에 빠지고 균열과 틈새에서 방황한다. (노트에서 번안·필자)
작가는 기표와 실재의 틈새를 메우려는 데서 알레고리를 창안했다. 심리적·신경증적 분열을 일으키는 건 창조를 위한 잉태의 고통이다. 역으로 말해, 분열증을 상징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작가는 ‘페르세포네의 밀실’을 재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다 수선화의 변종들(heterogamies)을 그리는 건 페르세포네의 유혹과 충동에 의한 것이다. 이 길만이 자신의 분열증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장해서 말해, 불확실성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고뇌이자 자신의 고뇌를 이렇게 해서 치유하려는 것이다.
이번 <사막정원, A Desert Garden>展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사막정원’은 종래의 ‘우의의 방’을 ‘우의의 정원’으로 확장했다는 데 뜻이 있다. 방과 정원은 규모의 차이일 뿐 전후간의 기의적 차별이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방을 정원으로 확장하기 위해 꽃과 식물의 품종을 하나, 아니면 최대 수십 개로 복수화해서 그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법 또한 다양해졌다. 이것들이 알레고리의 품목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 작가가 변종 시켜 그렸다. 변종 시킨 꽃과 식물들은 이 시대의 어두운 세계상을 시사한다. 얼룩을 가하거나, 스며들게 하거나, 피어나게 하거나, 사막에다 방을 설치하는 여러 방법들을 시도한 건 이 세계 또한 그처럼 변종되고 퇴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육종학자나 변종축성의 기분으로 ‘사막’이라는 가설무대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야성적인 가상의 꽃과 식물을 그렸다.
‘사막’이라는 가설무대는 ‘오늘’이라는 삭막한 시공간의 이름이다. 이 무대는 선과 악이 각축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온갖 선과 악의 변종들이 들끓는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변종들끼리 사악하게도 ‘이종교배’(hybridity)를 자행한다. 최악의 독성을 갖춘 음흉한 개체들만이 사는 곳이 사막이다.
변종들의 시대에 살아남고자 작가는 이에 걸맞는 현란한 모양과 색상을 갖춘 이미지를 그린다. 사막에다 이종들이 사는 방(房)을 회화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예술적 생존전략을 강구한다. 가시가 무서우리만큼 날카롭고, 꽃잎이 섬뜩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점박이로 가득한 얼룩의 면면들은 물론, 온통 줄음질로 빚어진 다양체(multifolder)가 부화하고, 피어나고, 섞이고, 이종화해서 이름 모를 붉은 빛을 띤 야성(野性, savageness)이 탄생한다. 보는 이에게 아름다우리만큼 거칠고 거반은 충격적이다. 시들어가는 꽃에 피어나는 곰팡이, 만개한 꽃에 피어나는 선인장, 사막에도 봄이 존재한다고 우기는, 그야말로 역설로 그려낸 음산한 생명체들이 경쟁하듯이 화면에 등장한다. 이름하여 영락없는 ‘페르세포네의 정원’이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그의 ‘사막정원’을 보면서 ‘페르세포네의 정원’을 생각할 것을 권유한다. 실존과 영혼이 시들어 사막화된 현실에서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야성적인 생명체를 닮아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아니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야성의 세계로 유인하는지는 최종 그의 「박사논문연구」가 말해준다. 연구노트가 전하는 건 실재와 가상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한 회화적 전략을 뜻하는 ‘상징적 봉합’(縫合, symbolic suture)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한 여류작가 루이스 부르주아가 그랬던 것처럼, 정지현 또한 ‘우의의 방’에다 이미지의 변종들을 증식함으로써 종국에는 실재와 가상의 균열을 메우고자 한다. 결코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책략이다. 이 시도는 정신분석적 틀로 보면, 성숙한 인간이 유아기로 돌아가려는 정치적인 퇴행적 발상이다. 라캉이 지적하듯이,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서 언어를 말하자마자 언어에 의해 주체를 상실하고 타자화된다. 주체이면서 주체가 아닌 것이 된다. 우리의 시대가 모두 이렇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표(상징)와 실재 간에는 한없이 틈새가 벌어진다. 이를 메우기 위해서는 일단 어린 시절 순박했던 ‘거울시대’(mirror stage)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 페르세포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몰입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할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의의 방’같은 ‘이마고’의 시뮬라크르를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운명이라고 정지현은 생각한다.
정지현은 여기서 시선을 멈춘다. 대모(大母) 페르세포네가 살고 있는 샤먼(shaman)의 방 같은 스펙타클을 빌려야 한다는 것, 이를 알레고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의의 방’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근작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시킨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사막정원>이 그 전모를 함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