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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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현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연이나 인공적 구조물은 복잡한 표면 굴곡과 미세한 음영 처리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환영에 가깝다. 잡힐 듯 말듯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뭉글뭉글한 환영 위에 덧입혀진 붉은 색 가시나 점들은 관객의 시선을 화면 앞으로 당겨준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작품들은 시각적 환영과 촉각적 구체성 이라는 양극 사이에 존재하면서, 회화가 가지는 이중성을 예시한다. 건조한 지역에서 수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돋아난 선인장의 단단한 가시나, 푹신하고도 매끄러운 가구 위에 돋아난 곰팡이는 오일, 에나멜, 또는 구슬 같은 것으로 덧입혀진다. 그것은 에어 브러쉬로 분사된 희미한 대상과 달리, 강한 시각적 악센트를 주면서 화면에 이질감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화려한 색을 지닌 나비나 물고기 역시 탈색되는 중이어서, 존재와 표면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폭이 거의 4미터 가까이 되는 신작 [사막의 봄](2008)1 은 안정된 삼각형 구도 속에 파초같이 잎을 뻗은 선인장을 정점으로, 작가가 그동안 다루어 왔던 다양한 형태의 선인장을 총 집결시킨다. 붉은 색 가시들이 선인장을 감싸고, 둥근 형태의 선인장 말단은 붉은 물이 들어있으며, 나비와 물고기 등은 자신의 보호색을 지운다. 평범한 정물, 또는 풍경 같은 화면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은 이원화된 채색 방식, 영원한 불모의 땅 같은 사막에 찾아온 봄, 그것이 내포하는 결핍에서 충만으로의 도약, 언뜻 자연스러운 풍경 같으면서도 지상과 수중이 공존하는 불가능한 풍경 등이다. 작품 [사막의 꽃](2007)2 은 꽃잎 안에 존재하는 부드러운 꽃술이 날카로운 선인장으로 변모한 것으로, 가시에 찔려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져 있는 듯하다. 이 변형식물은 동물적인 공격성이 두드러진다.
  또 다른 [사막의 꽃](2008)3 은 코사지나 만다라 같은 대칭성을 가지면서 붉은 물이 중심부로 스며든다. 작품 [피어나다](2007)4 에서 붉은 점들과 가장자리에 선들은 밀도의 차이에 의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했을 법한 물질의 흐름을 보여준다. 2008년에 제작된 [피어나다]5 는 꽃술 말단에 집중된 붉은 점이 흩어지면서 생명의 기운이 감소하는 이미지이다. 꽃은 시들지만 시들어가는 개체를 양분으로 새로이 생명의 과정이 시작된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서랍장이나 의자 같은 인공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에도 어김없이 붉은색 포인트가 존재한다. 선인장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인 2000년대 중반에 시작된 가구 시리즈에는 선인장이 같이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 [피어나다](2007)6 는 부드러운 의자 위에 붉은 점들이 선인장의 붉은 가시처럼 이질감을 자아낸다.
  [부드러운 서랍장](2008)7 은 마치 연작처럼 같은 크기와 소재를 갖추었으며, 연상의 그물망으로 이어진다. 부드럽게 처리된 서랍 장 안에 놓인 선인장은 마치 홀씨처럼 구슬을 가구 다리로 흘러내린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서랍장 안의 선인장이 붉은 색이며, 마침내 서랍 안은 비워지고 붉은 점들이 홀씨처럼 아래로 퍼진다. 가구들은 ‘사막의 정원’에 존재하는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지상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둥 떠 있는 듯하며 두리뭉실 초점이 없다. 정지현의 풍경이나 정물에는 그것이 놓여있을 법한 배경이 삭제되어 있다.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시공간이 없는 진공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가 부재의 공간이 아니듯이, 바탕면의 화이트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집약된 밀도 높은 표면으로 여러 겹으로 실행된 바탕 작업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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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백, 또는 탈색된 듯한 배경과 형상은 그 위에 첨가된 가시나 곰팡이의 이질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러한 긴장감은 [사막의 꽃]이나 [사막 정원]같은 작품 제목이나 전시부제가 내포하는 역설과 연결된다. ‘사막의 꽃’이나 ‘사막의 정원’은 거칠고 황량한 사막 풍경에서 어른거리는 오아시스 같은 환영적 느낌을 준다. 흥미롭게도 정지현의 주요 작품 모티브인 선인장은 남미지역에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환각식물의 하나로 간주된다. 피터 퍼스트는 [환각제와 문화]에서 고대 아메리카 예술에서 묘사된 최초의 환각 선인장인 페요테의 효과는 자연계의 물체 주변에 나타나는 흐릿한 영기뿐만 아니라, 찬란한 색조의 영상을 포함하여 시간과 공간 인식의 변화와 무중력감, 거시증을 느낄 수 있고, 아울러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전한다.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환각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지각의 문을 넘는 경계의 체험, 그리고 고도의 감정적 긴장과 이완을 낳는다. 그것은 환영과 심층적 현실을 중첩시킨다. 그리고 나비 역시 꿈속에서 나비가 된 장자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다는 호접몽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소재이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선인장 몸체에서 예시되는 환영에서 갑작스럽게 현실을 일깨우는 것은 핏빛 가시이다. 가시는 변형된 피부로 고정된 경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개체와 환경 사이의 가교가 된다. 가시는 접촉의 느낌, 무엇인가와 접촉할 때의 곤두서는 신경과 연결된다. 그것은 마치 피부의 털처럼 예민한 촉각 수용기이다. 정지현의 작품 속 선인장의 가시는 다소간 희미하게 표현된 몸체와 달리 예민한 촉각성을 강조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과학자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촉각은 최초로 점화되는 감각이며, 맨 마지막에 소멸한다고 전한다. 다른 감각에 비해 촉각은 온몸에 퍼져있다. 애커먼은 촉각이 없이 사는 것은 흐릿하고 마비된 세상을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촉각은 시각과 더불어 우리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영장류는 시각과 촉각을 결합하여 공간 속에서 물건을 찾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촉각은 생명이 깊이와 모양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세계와 자신이 삼차원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화가는 촉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선인장 가시들은 시각이 가지는 화려한 형태 및 색채를 억제하고. 세계를 민감하게 더듬는 촉각 수용기를 상징한다. 그것은 세계를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련된 감각인 촉각성을 극대화한다.
  보여주기를 주요 과제로 삼고 있는 통상적인 재현주의에서, 색채는 대상의 형태와 깊이를 부여하는 촉각적 감각을 암시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였다. 정지현의 작품에서도 색채는 촉각적이지만, 대상의 그럴듯한 재현을 위하여 동원된 것이 아니다. 세계와의 접촉 그 자체를 강조하는 그것들은 마치 점자 같은 느낌도 준다. 가시와 더불어 붉은 색조의 시각적인 포인트가 되는 것이 눅눅해진 가구에서 돋아났을 법한 곰팡이 이다. 이 이질적 요소는 역설적으로 가구의 부드럽거나 반질반질한 표면을 강조한다. 식물에 비해 자연스러운 색채를 입은 것은 물고기나 나비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표면을 뒤덮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는 개체를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작품의 일관성을 위한 형식적 장치라기보다는, 색이 가지는 본래적인 특성과 관계된다. 애커먼은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반사되는 빛, 즉 흡수되지 않는 빛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사과를 붉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과는 빨강을 제외한 모든 색이라는 것이다. 에어 스프레이로 희미하게 처리된 대상들은 그 자체로는 색소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역시 자신들을 둘러 싼 환경에 반응하는 얇은 표층들이다. 그것들은 마치 백조의 깃털이나 나비의 하얀 날개처럼 태양의 흰 빛을 반사한다.
  화면에 종종 붙어 있는 구슬 역시 빛의 입사와 반사를 조절하여 화면의 활기를 부여한다. 동물의 화려한 색은 배우자나 어미, 적에게 보내는 다양한 신호이며 위장술이다. 나비의 얼룩은 거대한 눈처럼 보여 포식자를 위협한다. 물고기에게 위장이란 물처럼 반짝거려서 몸의 윤곽을 감추는 것을 의미한다. 물고기의 비늘은 서로 겹치면서 빛을 내고 색깔을 사라지게 하면서 거울 같은 효과로 포식자의 눈을 피한다. 색이 빠지고 있는 나비나 물고기들은 지상과 수중이 공존하는 마술적 생태계에 맞춰 의태(擬態)의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식물도 변태한다. 만개한 꽃들이 검버섯처럼 표면을 잠식하고 있는 얼룩이나 빨간 곰팡이 같은 형태로 변하면서 시들어간다. 이동할 수 없는 식물들은 번식을 위해 화려한 색으로 새와 곤충을 유인한다. 식물의 색소는 시간에 따라 그 조성이 변화하는데, 시들 때 나오는 색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만개했던 시기에 가려져 있던 색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식물이 절정기에 가졌던 위장색은 사라지지만, 죽음과 해체의 색 역시 오묘하다.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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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련하게 깔려있는 대상 위에 가필된 가시나 붉은 점은 질료의 이질성으로 인하여 강한 평면성을 가진다. 리드미컬하게 배열되어 있는 선과 점의 무리들은 그 자체로만 보면 재현의 1차적 참조대상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 패턴이다. 그것은 3차원의 사물을 2차원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그것은 사물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채색된 표시, 곧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인 것이다.
  한편, 가구나 선인장 같은 참조대상은 화면 중앙에 혹은 화면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뿌옇게 처리되어 있다. 그것은 대상과의 유사성을 통해 사물을 확정하는 눈속임 기법trompe-l'œil과는 거리가 있다. 눈속임 기법은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확신을 전제한다. 투명한 창에 대한 회화적 패러다임은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화가 정지현의 작품은 대상을 투사하는 투명한 창을 자임하지 않으며, 여러 겹으로 설정된 은폐된 조직망을 가동시킨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희미한 그림자를 닮았다. 벽면에 동굴 밖 실체의 그림자들이 투영되는 플라톤의 유명한 비유는 투영이라는 모티브에 관련된 대표적인 재현의 탄생 설화이다.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플라톤적인 세계관에서 동굴에 드리워진 흐릿한 그림자는 실재와는 거리가 먼 미메시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플라톤주의는 재현적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가 현상 배후의 본체, 이데아를 중시하며, 이를 근거 짓는 재현에 묶여있다고 지적한다. 플라톤의 사유는 곧 원본과 이미지의 구별, 원형과 모상의 구별이다. 여기서 원형은 어떤 근원적이고 월등한 동일성을 누린다. 플라톤주의는 원형과 본질을 정의하는 자기 동일성의 형식이다.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오며 유기적인 질서로 조직되는 재현의 체계는 이에 부합되지 않는 무질서를 결여와 부재로만 정의한다. 그러나 정지현의 작품에서 재현은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로부터 연유한다.
  이미지를 이루는 그림자 같은 형상은 타자와 부재를 대변한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최초의 유사물이 만들어진 것은 그림자로부터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는 고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인용하면서 회화가 선으로 윤곽을 그린 인간의 그림자에서 최초로 태어났다고 지적한다. 회화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체의 부재와 그 투영된 형상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재현이 그림자에 근거를 두었던 근본적 목적은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이다. 그것은 예술적 재현의 탄생이 음화(陰畵)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에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었다. 그림자는 거울과 달리, 동일자보다는 타자와 관련된다. 그림자는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유사성likeness인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재현적 전통에서 그림자는 곧 거울로 대체된다. 거울 패러다임을 단독으로 주장하는 최초의 미술론이 탄생한 것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다. 그때부터 서양회화는 너무나 확실하게 동일자의 사랑의 산물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줄리언 벨은 [회화론]에서 재현이란 그 안에서 경험이 발생하는 공간 배열, 곧 어떤 형성, 모형, 추상적인 기하학이지만, 재현 자체, 즉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지엽적인 차이의 드러남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림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호들의 체계이다. 현대 언어학 이론이 주장하듯, 기호들은 의미화 체계인 기호들의 망상 조직 안에서 서로 간의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 사물들은 그 언어를 구성하는 차이들의 체계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분열뿐 아니라, 지시대상의 부재와도 관련이 있다. 구별되는 화면의 층을 보여주는 정지현의 그림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괴리를 예시한다.
  이러한 괴리는 현대 언어의 특징이며, 동시에 환상성을 낳는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환상성이 기의 없는 기표를 통해 현존을 부재로 대체시킴으로서, 비의미화의 영역, 즉 죽음을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흐릿한 이미지들은 대상의 부재를 암시한다. 그것은 대상을 확언(리얼리즘)하는 것도, 언어로의 환원(추상)도 아닌 제 3의 길이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탄생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하지만, 모든 동일성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복은 재현의 일관성을 교란하고 재현의 근거를 파괴한다. 특정한 배경이 없이 비워놓은 정지현의 화면은 재현적 근거를 와해시키고 바탕의 자유를 예시한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모상이 아니라, 허상과 관련된다. 이데아가 재현의 세계를 창시하거나 근거한다면,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허상, 시뮬라크르)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허상들은 체계들 안에서는 어떠한 선행의 동일성도 어떠한 내면적 유사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는 부인되어야 하며, 허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허상은 원형이나 특권적 위치라는 생각 자체를 전복하는 행위이다. 재현이 동일성을 요소로, 유사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허상은 계속되는 불일치를 기준으로 한다. 시뮬라크룸은 미메시스처럼 실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결여를 전제로 한다. 추상회화는 재현할 모델이나 서사가 없으며, 도상의 유사성을 거부하면서 순수한 형태를 지향한다. 정지현은 재현주의의 동일성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완전한 추상 회화로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회화의 예를 직접 다룬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추상회화가 상징적 코드에 의존함을 비판한다. 추상적인 시각 공간은 고전적인 재현이 포함하고 있던 촉각적인 긴장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추상도 구상도 아닌 제 3의 길, 즉 형상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이미지 밖의 지시대상의 상정이나 개념적 요소를 제거한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여러 저서를 통해 끈질기게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재현(표상)적 모델이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는 의미 대신에 욕망의 문제를, [카프카 론]에서는 원형 대신에 변신의 세계를, [차이와 반복]에서는 광학적 공간 대신에 촉각적 공간을 제안한다. 촉각적인 공간은 눈으로 만지는 공간이다. 욕망이나 변신의 문제에 닿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촉각성이 강조되는 정지현의 그림은 재현적 사고를 뒤흔드는 현대철학의 사고에 상응하는 현대회화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정지현은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로 이미 점거되어 있는 낡은 재현적 틀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짜고자 한다. 이때 촉각성은 광학적 코드에 의한 형태 포착이 아니라 쉴 새 없는 움직임을 낳으며, 회화의 야생적 바탕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