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주원 (미학, 큐레이터)

수맥이 끊어진 건조한 사막에 정원이라…? 정지현의 개인전 <사막정원>은 이렇게 제목부터 모순과 역설의 특성이 전제되는 전시이다. 자연이긴 하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원, 그에 대한 얘기는 태초에 잃어버린 에덴을 되찾기 위한 시도이며 자신의 세계 구현에 대한 강한 열망에의 제스추어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정지현의 경우 그 장소가 사막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니 정지현의 <사막정원>은 불확실성과 불안한 이중성이라는 심리적 잠재성을 지닌 장소이다.

상식적인 현실 속의 정원들처럼 정지현의 <사막정원>은 일면 대지와의 관계 속에 꾸며진 유사자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거나 대지와의 관계가 거세된 정원으로서의 비현실적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화면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선인장, 꽃 등으로 대변되는 자연물 혹은 서랍장, 의자 등으로 대변되는 인공물들로 표상된다. 이들은 단독 혹은 그룹으로 작가의 정원을 가득 채운 자연 혹은 자연의 일부이고 질서이며 휴식의 제공처이자 유토피아의 표상이기도 하나, 동시에 인공 혹은 자연의 결핍이고 반질서이며 척박한 현실에의 극복의지이자 유토피아에 다다를 수 없는 현실의 표상인 것이다. 그러니 작가의 말대로 그가 그리는 대상들은 영원히 안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국 허구이며 죽음과 폐허에서 생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노스탤지어적 몸부림이다.

예컨대, 신기루와 같이 가까이 가면 곧 사라질 환영과도 같은 그의 화면 속 자연물과 인공물들은 화려한 색채를 지니기 마련인 태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탈색과 표백의 과정 속에 놓여진 이들의 무채색 신체는 피고 돋는 붉은 가시와 곰팡이를 통해, 죽음에 직면해 있지만 마지막 남은 생을 향한 열망을 가시화한다. 가시와 곰팡이가 암시하는 시간의 추이는 죽음과 생명의 교차점, 그 곳에서 열리는 틈에 다름 아니다.

정지현의 정원 속의 환각적 비밀은 여기에 있다. 비현실적인 그의 정원은 현실로부터 모티프를 취하고 있다. 실제로부터 격리된 환영의 세계로서의 <사막정원>은 현실 너머의 영원한 실체를 향하는 대신, 현실의 텍스트적 경계를 변형하거나 발작시킨다. 이는 정지현의 정원이 환상적이되 신기함이나 기이함, 마술성과도 같이 몇 가지 특성에 의해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경험의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파열적으로 독해해 나가는 작가의 불확실성, 불안한 이중성 등이 잠재된 심리적 장소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의 정원은 현재의 시점, 현실의 시간 밖으로 내몰려 고립되거나 객체화되지 않는다.

특히, 선인장과 꽃, 나비와 물고기 등이 혼재하는 <사막의 봄>(2008)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일변하고 있다. 현실의 정원이라면 넘쳐야 할 색채와 향기는 그의 정원에선 거세되었다. 정원의 방문객인 관람자는 돋아나는 붉은 가시와 흘러내리는 혈액으로 인해 정서는 억압되고 신체는 긴장된다. 게다가 지상인지 수중인지 가늠 할 수조차 없는 그의 정원은 그 누구에게도 산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안한 이중성이 감도는 그의 정원 속 <사막의 꽃>(2007)은 화면 안에 단독으로 그려진 꽃의 초상이다. 눈에 띠는 것은 꽃의 형태인데, 꽃잎에 둘러싸인 부드러운 꽃술은 생식기로서의 기능을 부정한 채, 가시 도친 꽃술을 지닌 동물적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즉 향기를 통해 생명을 불러들였던 식물로서의 수동적 태도를 포기한 채 예민한 촉각적 몸놀림으로 세계를 더듬거나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적극적인 동물적 공격 의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부재를 상기시키는 지대로서의 사막에서 불안과 불확실성, 고독과 노스탤지어를 통해 살아나고 세계가 되는 정지현의 정원은 얼핏 보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교훈적 경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나 공허와 허무를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의 현대적 변용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들과 정지현의 차별적인 지점은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는 신의 섭리, 즉 영원한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정물화 속 해골 등의 정물들과는 달리, 현재의 지점에서 소생을 기도하는 생명에의 충만한 의지에 있다. 결핍 없이 사랑도 없다는 플라톤적 에로스는 현실의 시간을 통로로 하여, 정지현에 의해 이렇게 번안되고 있는 것이다.